단편소설 14

[단편] 이웃집 여자아이

1. 나는 올해로 40세가 된,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을 두고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물론 나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내도 있다. 말 그대로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같은 마누라를 둔 남자다. 나는 1년 전만 해도 XX물산의 사장이었다.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부채 없는 건실한 회사라 남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직장이 없다. 1년 전쯤에 나에게 닥친 불행 때문이다. 거래처인 OO통상과의 업무를 위해 대전으로 차를 몰고 가던 중에 중앙선을 침범한 대형 트레일러와 정면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7개월인가 8개월 동안 병원 침대 신세를 져야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였다. 내가 살고 있는 ..

[단편] 모기 영웅 전설

세상에는 다양한 생명체가 있다. 그리고 그 어떤 생명이든 소중하고 나름의 존재의 이유가 있다. 나는 모기로 태어났다. 인간에게는 하찮고 성가시게 여겨지는 존재이지만, 나는 모기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한국의 어느 한 구석에 위치한 시골이 나의 고향이다. 그곳은 흙냄새,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 농부들의 땀 냄새가 정겨운 곳이다. 그런데 그린벨트라는 것이 풀리면서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굉음을 내는 이상한 기계들이 들락날락거리더니 공장이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었다. 어릴 때 내가 놀던 곳은 어느 하수구였다. 나는 하수구의 시원한 물에서 친구들과 헤엄치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나는 종종 하수구의 외진 곳에서 홀로 책..

[단편] 마법의 창(窓)

입김을 불었다. 유리창에 입김이 서려 뿌옇게 되었다. 창에 서린 입김을 지워냈다. 입김이 사라짐과 동시에 유리창에 비치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마법의 창(窓)] 인간은 항상 뭔가를 필요로 한다.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 발명은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인간은 이전보다 진보된 이기를 원한다. 이런 과정이 순환되면서 인간의 문명은 발전해왔다. 2010년, 전 세계가 과밀화된 후 건설 업계에 불황이 찾아왔다. 더 이상 건물을 지을 곳이 없어지고, 웬만큼 낡은 건물이 아니면 건물을 철거하지도 않았다. 건물을 철거할 때 발생하는 분진과 소음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건설 업계는 건물의 보수와 수리, 리모델링과 같은 개조 작업에 전력투구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한정된 수요뿐이라서 건설업체는 하나둘씩 문을..

EPE(EarPhone Evolution)

프롤로그 세상은 고요하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도, 신나는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금 나는 아주 긴 줄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나의 몸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 나의 귀!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이미 N13579가 지배하였다. 오늘도 난 EP(EarPhone)에 N13579를 보충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2004.9. 매스컴이 떠들썩했다. 일본의 초미니 카세트 전문 제작사인 S사가 3년 전 카세트의 초 소형화(3 X 4cm)에 이어 감성 인식 기능을 가진 이어폰을 개발해냈다. 지난 10년간의 비밀 연구(프로젝트명 EPE)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EP속의 N13579가 사람의 감성 변화를 인식하여 사람의 귓속 달팽이관을 대신해서 소리를 전달해주는, 이른바 21세기를 이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