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같은 이야기/단편 14

[단편] 잠을 저축하세요! - 수면 저축 은행 -

[단편] 잠을 저축하세요! - 수면 저축 은행 - 요즘 현대인은 시간에 쫓기며 살아간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계획을 세우면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현실이고, 몇 해 전 이와 같은 틈새시장을 노린 한 중소기업이 “시간 관리사”라는 것을 만들어서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고객들의 직업과 성별, 나이 등에 맞게 시간 계획을 해주고 스케줄을 미리 알려주는 일종의 비서와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의 낭비를 효율적으로 막지는 못했다. 자신의 일을 남이 미리 계획하는 것 때문에 사생활 침해 논란이 일었고 자기 자신만큼 자신의 일을 효율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해서였다. 이런 고민은 시간의 관리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루의 3분의 1정도를..

시누크(Chinook)

시누크(Chinook) 새로운 놀이 기구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우방 랜드로 달려왔다. 얼마 전 9시 뉴스를 통해 새로 나온 놀이 기구가 그 전의 놀이 기구의 가격을 뛰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기대가 컸다. 인터넷을 통해 어렵게 구입한 탑승권이 1만원인 것을 볼 때 새로 나온 놀이 기구는 대단한 스릴을 선보일 것 같았다. [2010년 1월 21일 오후 12시 40분!] 내 탑승권에 인쇄된 놀이 기구의 탑승 시간이었다. 내가 가진 새 놀이 기구의 탑승권은 한반도를 통틀어 총 15명에게만 한정 판매된 새 놀이 기구의 첫 탑승권이었다. 나는 30명 중 1명에 드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물론 내 여자 친구도 나와 같이 탑승하게 되었다. 나와 그녀는 설렘을 안고 오전 일찍 우방 랜드를 찾았..

[단편 소설] Be the Reds(빨갱이가 되자)

Be the Reds(빨갱이가 되자) 오후 10시 정각을 알리는 시계 화면이 끝남과 동시에 의 방송 시작을 알리는 화면과 함께 로고송이 송출된다. 화면은 방송 스튜디오의 모습으로 바뀐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사회의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을 ‘파헤쳐 보고, 고민해 보고, 다시 보는’ 의 최성훈입니다. 지난 주 방송에서 다루었던 인터넷의 악성 댓글에 대한 시청자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이 한 국회의원의 “악성 댓글 처벌법” 발의라는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저희 방송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제 옆 자리에 의 김익선 프로듀서가 나와 있습니다. 김 피디, 오늘 방송에서 다룰 내용을 소개해주시죠? - 네, 안녕하십니까? 김익선입니다. 오늘 에서 다루어 볼 문제..

[단편] 혈액형 살인 사건 (두 번째 버전)

혈액형 살인 사건 내 이름은 신의진이다. 남들이 꺼리는 직업인 경찰이 나의 직업이다. 그것도 교통과 순경도 아닌 강력반 형사이다. 올해로 30살이 되는 내가 친구들에게 항상 듣는 말은 “너는 결혼하기 힘들겠다.”라거나 “그래서 내가 그때 교통과로 가라고 했잖아.” 따위다. 내가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고 지원한 곳이 강력반이었을 때 홀로 나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펑펑 우셨다. 친구들도 나의 결정에 반대하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나는 한 번 결심한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라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반에 들어갔다. 나는 변변찮은 봉급과 목숨을 담보로 내어놓고 뛰어다니는 강력반 형사라서 항상 여자친구를 오래 사귀지 못한다. 나의 첫 인상에 반했던 여자들도 ..

[단편] 혈액형 살인 사건 (첫 번째 버전)

혈액형 살인 사건 올해로 형사 생활 15년이 된 나는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그날의 그 사건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맡은 첫 사건이기도 했던 그 일이 떠오르면 내 몸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1. 비가 내리는 겨울날 혈액형에 관한 영화가 개봉했던 해의 겨울이었다. 겨울에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그 해는 나에게 정말 특별한 해였다. 어렸을 때부터 경찰의 꿈을 가지고 살아온 내가 경찰의 꿈을 실현한 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맡았던 첫 사건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몇 달간의 대기 기간 후 경찰서에 발령을 받은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강력반에 지원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강력반보다는 교통과에 지원하기를 권유하였지만 누구보다 투철한 정의감에 불타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단편 소설] 나우히어(NowHere)

나는 서른 두 살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과 그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한다. 내가 출근을 하기위해 집을 나설 때면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은 “오빠, 올해는 꼭 장가가야지?”라는 입에 밴 말을 하며 인사를 한다. 나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한 번 살짝 웃어주고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차고로 가서 작년 내내 고생하며 할부금 납부를 끝낸 나의 애마인 흰색 승용차에 오른다. 시동을 켜면 들려오는 것은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멘트로 시작하는 라디오 방송이다.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곡을 들으며 내 애마와 함께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그렇게 20여분 운전하면 도착하는 곳은 작은 무역 회사 건물이다. 이곳이 올해로 4년째 ..

[단편 소설] 인터넷 소설 월드컵

[2006년 2월 1일] 웹상에 모두 16명의 작가가 모였다. 이름하여 인터넷 소설 월드컵! 지난 6개월간의 예선전을 거쳐 본선에 오른 16명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16강전의 시작! 인터넷 소설 월드컵의 16강전은 대진표 추첨으로 시작되었다. 추첨은 문화관광부 장관이 직접 나와서 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행사의 모든 진행 상황은 온라인으로 중계가 되었다. 상자 속에 담긴 16개의 번호가 각각 새겨진 구슬이 그의 손에 쥐어져 나올 때 마다 작가들과 독자들의 희비가 교차되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를 16강전의 대진 상대로 만난 작가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비교적 쉬워 보이는 상대를 만난 작가의 얼굴에 미소가 약간 비치었다. 이것은 물론 각각의 작가의 컴퓨터에 달린 화상 캠을 통해 중계되는 모습이었다...

[단편 소설] 생일 축하합니다

1. 어두운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고요함을 참지 못하는 듯한 어색한 기침 소리가 한 번 뱉어져 나왔지만 어둠 속이었기에 약한 인내심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물론 기침 소리의 당사자를 제외한다면. “지금 들어온대, 모두 준비해.” 귀에 꽂힌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 정보를 모두에게 알리던 선호가 성냥을 그었다. 어둠을 쫓아낸 성냥의 불씨는 이내 케이크에 꽂힌 하나의 초에 옮겨졌다. 주어진 임무를 끝낸 성냥불을 입으로 불어 끄는 선호의 얼굴에 비장감이 흐르는 듯 보였다. 케이크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은 선호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고 모두가 조용히 케이크와 닫힌 문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촛불이 부끄러워할 정도의 밝은 빛과 함께 한 소녀가 나타났다. 작은 키에 긴 생머리의 ..

[단편] 이웃집 여자아이

1. 나는 올해로 40세가 된,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을 두고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물론 나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내도 있다. 말 그대로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같은 마누라를 둔 남자다. 나는 1년 전만 해도 XX물산의 사장이었다.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부채 없는 건실한 회사라 남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직장이 없다. 1년 전쯤에 나에게 닥친 불행 때문이다. 거래처인 OO통상과의 업무를 위해 대전으로 차를 몰고 가던 중에 중앙선을 침범한 대형 트레일러와 정면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7개월인가 8개월 동안 병원 침대 신세를 져야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였다. 내가 살고 있는 ..

[단편] 내 영혼을 기증합니다

2004년,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사람 13,100명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신장, 골수, 간장을 이식 받은 사람 1,695명 뇌사자 86명으로부터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 363명. “휴우.” 지나간 통계 자료를 보던 나는 한숨을 크게 지었다. 뇌사자 86명이 363명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내 몸의 전율이었다. 내 나이 올해로 스물아홉, 내년이면 나도 가수 김광석이 그의 노래 ‘서른 즈음에’에서 말하던 것처럼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질 나이다. 나는 올해로 입사 2년차가 된 평범한 직장인이다. 남들은 내 나이쯤 되면 미래의 배우자를 고르기 위해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빠른 승진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