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같은 이야기/단편

[단편 소설] 나우히어(NowHere)

조약돌(Joyakdol) 2009. 2. 11. 00:25
나는 서른 두 살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과 그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한다. 내가 출근을 하기위해 집을 나설 때면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은 “오빠, 올해는 꼭 장가가야지?”라는 입에 밴 말을 하며 인사를 한다. 나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한 번 살짝 웃어주고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차고로 가서 작년 내내 고생하며 할부금 납부를 끝낸 나의 애마인 흰색 승용차에 오른다. 시동을 켜면 들려오는 것은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멘트로 시작하는 라디오 방송이다.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곡을 들으며 내 애마와 함께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그렇게 20여분 운전하면 도착하는 곳은 작은 무역 회사 건물이다. 이곳이 올해로 4년째 다니게 된  나의 직장이다. 회사에 출근하면 항상 나보다 일찍 와 있는 미스 김은 “안녕하세요, 홍 대리님.”하며 인사를 건넨다. 그럼 나는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웃으며 대꾸한다. 곧이어 출근할 신 과장은 “홍 대리, 오늘 무슨 좋은 일 있나봐?”라고 인사할 것이고, 남 부장은 “홍성루씨, 내가 좋은 맞선 자리 알아놨는데 생각 있으면 말하게나.”라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릴 것이다. 나의 하루는 그렇게 매일 같은 식으로 시작한다. 나는 오전에는 매일 반복되는 듯한 서류 정리 작업을 하며 보낸다. 가끔은 어제 정리했던 서류가 오늘 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점심시간에는 “어이구, 이 총각 참 마음에 든다니까. 내가 딸자식만 있었어도.”라고 말을 하며 밥 한 그릇을 더 건네주는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의 식당에서 된장찌개와 함께 밥을 먹는다. 일보다는 춘곤증과 싸웠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을 오후의 업무가 끝나고 퇴근 시간이 되면 입사 동기인 이 대리는 “성루야, 오늘도 그냥 가려고? 이런 날 한 잔 해야 하는 거야.”라며 손을 들어 소주잔을 꺾는 모습을 해 보인다. 그의 권유를 뿌리치고 다시 나의 애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나를 맞아주신다. 어머니와 함께 텔레비전을 잠시 보다보면 ‘따르릉’하고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서 늦게 들어온다는 여동생의 전화다. 곧이어 울리는 전화벨 소리의 주인공은 거래처 사장의 접대가 있어서 새벽에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아버지다.


이렇게 반복되듯 지루한 나의 일상에서도 내가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나의 좌우명 때문일 것이다. 나의 좌우명은 “nowhere”다. 보통 사람들은 “노웨어“라고 읽는 이 영어 단어를 나는 “나우히어“라고 읽는다. “노웨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나우히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사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적 세계이다. 그리고 나의 좌우명은 내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4년제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나를 돋보이게 하는 좌우명이라는 생각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으로, 때론 입 밖으로 이 단어를 되뇌며 뿌듯함을 느낀다. 그 외에 내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특별한 취미활동을 가지지 않고 있다. 한 가지에 취미활동이라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틈이 날 때마다 보는 영화 정도일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짐 캐리가 주연을 맡았던 ”트루먼 쇼“이다. 결혼한 아내가 있는 트루먼이라는 이름의 샐러리맨이 그동안 자신의 삶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거짓 삶이었음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나는 이런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를 존경하게 되었고, ‘내가 만약 트루먼과 같은 입장이었다면?’하고 생각하며 홀로 피식 웃어보기도 하였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트루먼과 같은 거짓 삶이 아닌 반복되듯 지루하기는 하지만 진짜 삶을 살고 있음을 느끼고 어딘가에 있을 이름 모를 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내 방은 내 또래의 보통 남자들의 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 흰색 옷장이 있고, 옷장 안은 몇 벌의 정장과 정장의 색깔에 맞추어 골라 입을 형형색색의 와이셔츠와 넥타이로 가득 차 있다. 옷장 안 한 구석에는 가끔 회사에서 친목도모 수단의 일환으로 열리는 등반 대회에 참여하기 위한 등산복이 깨끗이 세탁되어 놓여져 있다. 이제 내 옷장 안에서 캐주얼 복장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캐주얼이라면 집 안에서 입을 정도의 가벼운 운동복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옷장의 맞은편에는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하늘색 침대 시트가 말쑥하게 덮여있다. 방문 맞은편에는 창문이 있다. 5월의 햇살을 따뜻하게 받아들여야할 창문은 지금 내가 내려놓은 회색 블라인드 때문에 방과의 소통이 막혀 있다. 나는 빛을 막는 대신 살짝 창문을 열어두어 봄바람이 방 안으로 조금씩 스며들게 해 놓았다. 방문의 오른편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고 책상 위에는 노트북 한 대가 놓여 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정장 상의를 벗어 침대 위로 던졌다. 주름 하나 없이 말끔히 덮여 있던 하늘색 침대 시트에 조금 주름이 졌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오른쪽 검지로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눌렀다. 컴퓨터가 부팅이 되는 동안 두 팔을 모아 깍지를 끼고 하늘 높이 쭉 뻗어 기지개를 한 번 폈다. 정겨운 윈도우 시작음과 함께 컴퓨터가 시작되자 어제 다운로드 받았던 최신 팝송을 윈앰프를 통해 재생시켰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노트북에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얀 순결의 세상.


“전화 받으세요.”


휴대전화의 귀여운 아기 목소리 벨소리가 나를 다시 현실로 불러들였다.


여보세요.


“성루씨, 저에요.”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나의 연인, 그녀의 목소리였다. 남자 나이 서른두 살. 보통 내 나이대의 남자들은 결혼을 전제로 하고 이성교제를 하고 있었지만 나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조금은 필요에 의한 교제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리는 필요한 때에만 만나는 연인 사이였다. 그녀는 내일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그녀의 초등학교 은사님들을 모시는 동창회가 있으며 그 모임은 연인이나 부부를 동반하는 모임이라는 사실을 마치 회사에서 업무를 나에게 브리핑하듯 말을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내일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을게라는 말을 했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진 후였다. 가만히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노트북에 연결된 마우스를 손에 쥐고 윈도우 화면의 시작 버튼으로 마우스 커서를 옮겼다. 노트북을 끄려던 나는 내일 그녀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시작 버튼 위의 마우스 커서를 윈앰프로 옮겨 흘러나오는 팝송을 반복 재생될 수 있도록 설정하였다. 내일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긴장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 밤은 음악을 이불 삼아 편안하게 자기로 한 것이다. 샤워를 한 후에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전원 스위치를 내려 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편안한 멜로디가 귓가를 스치고 나는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꿈속에서 내가 본 것은 모든 것이 하얀 순결의 세상.


아침에 눈을 뜨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평소와 조금은 다른 면도 있었다. 평소처럼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오늘은 엉터리 일기 예보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오빠, 올해는 꼭 장가가야지?”라고 인사해야할 여동생은 아직 자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동생이 다니는 회사는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내가 4년째 다니고 있는 작은 무역회사는 그렇지 않다는 작은 차이가 나와 동생의 토요일 아침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토요일이라서 한 시간 늦게 출근하는 탓에 나의 애마에 올라 시동을 켜면 들려야할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멘트로 시작하는 라디오 방송은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시길 바랍니다.”라는 마지막 멘트로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자 미스 김이 “홍 대리님, 오늘 데이트 있으신가 봐요?”라고 웃으며 반겨주었다. 오늘 여자 친구의 동창회를 생각해서 조금 신경을 써서 옷을 입었기 때문인지 신 과장과 남 부장의 인사말도 내 옷차림에 관련된 것이었다. 오늘은 아침 업무, 점심 식사, 오후 업무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저녁의 약속에 계속 신경 썼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고 그래서인지 어떤 실수를 하지 않을까하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하루를 보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이 대리가 “성루야, 오늘 모임도 잘 하고 와.”라고 말하며 오른손을 높이 들어 파이팅을 외친다. 나는 친구의 응원을 뒤로 한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홍성루씨, 여기에요.”


나를 마중 나와 있던 것인지 그녀가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나의 팔짱을 낀다. 그것이 전부이다. 우린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고 동창회 모임의 분위기에 젖어 들고 있었다. 가끔 그녀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나누는 의례적인 대화가 오고 갈 때만 그녀가 나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우린 역시 필요에 의해 만나는 사이일 뿐이다. 동창회가 끝났고 여전히 내 팔짱을 낀 그녀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나도 가끔 고개를 숙이는 정도의 가벼운 인사를 하였다.


우리도 이만 갈까요?


나의 말에 그녀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나에게 팔짱을 낀 손을 비 오는 날 빨래 걷듯 재빨리 빼내었다. 그리고는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나의 제의를 거절한 채 “홍성루씨, 오늘 감사했습니다.”라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는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졌다. 나는 그녀를 붙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나의 애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반기는 것은 텔레비전 방송의 주말 연속극을 보고 계시는 어머니이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가서 방문을 연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책상이 나를 반기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내일은 회사에서 야유회 가는 날이군. 피곤해서 가기 싫은데. 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서서히 사라지고 눈앞이 서서히 하얗게 변한다. 온 세상이 눈이 내린 듯 하얗다.


일요일.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홍 대리님, 비 때문에 오늘 야유회 취소되었어요.” 김연주씨 - 내가 항상 미스 김이라 부르는 - 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운 적은 없었다. 회색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 밖을 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달콤한 봄비였다. 무엇보다도 가기 싫었던 야유회가 취소되게 만들어준 고마운 봄비였다. 나는 회색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봄비가 가져다준 오랜만의 휴식에 내 몸을 맡긴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가만히 누워있다 창가로 손을 뻗어 회색 블라인드를 다시 한 번 걷어 올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봄비 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다. 나우히어. 


달콤한 휴식 후에 나를 찾아온 것은 달콤하지 않은 월요병이었다. 오랜만에 긴장감에서 벗어났던 내 몸의 근육들은 이완된 채 다시 수축하지 않으려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방 안 가득 울리는 알람시계 소리를 무시하고 마치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누워있고 싶었다. 하지만 영혼이 육체를 떠나버린, 이제는 누구의 곁으로 움직일 수도 없게 된 시체처럼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싫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침대를 벗어났다. 아침 식사를 하며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고, 여동생의 배웅을 받고, 똑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같은 건물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인사말을 나누며, 같은 업무에 같은 일상. 나의 무료한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월화수목금토


내 삶의 놀라운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 일요일을 향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친구의 결혼식이 잡혀 있는 일요일을 향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목요일에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문상을 다녀왔었다. 일요일의 결혼식을 생각했었다면 가지 않는 것이었는데. 가족과 친지의 결혼식 전에는 문상을 다녀오지 말라는 금기를 기억했어야 했는데……. 사실 결혼식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문상을 다녀온 후인 금요일이었지만 말이다.


친구의 결혼식에 가기로 한 일요일 아침, 해가 떠올랐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봄의 기운을 가득 담은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오늘은 결혼식이 많이 잡히는 길일(吉日) 중의 길일이라는 말이 생각나니 몸 속 깊이 좋은 기운을 가득 받아들인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아침밥을 혼자서 먹었다. 부모님은 새벽 일찍 동네 사람들과 부부 동반 야유회를 떠나셨다. 구김 하나 없이 잘 다려진 흰색 와이셔츠를 꺼내어 입고 하늘색 넥타이를 맸다. 이제 상의와 바지만 입으면 출발 준비는 끝이다. 검은색 정장을 입으려다가 지난 목요일 문상을 갈 때 입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대신에 화사한 하늘색 정장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하늘색 넥타이를 풀고 분홍색 넥타이를 골랐다. 책상 서랍 안에서 흰색 봉투를 하나 꺼내 어제 은행에서 찾아온 빳빳한 새 지폐를 넣었다. 문상에 이어 결혼식이라니, 이번 달은 적자군. 한숨을 내 쉰 후에 집을 나섰다. 비록 내가 가진 돈은 줄어들지만 나의 마음은 넉넉해진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애마와 함께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에 이삿짐센터 용달차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길일 중의 길일이라 이사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가 보다. 결혼식장에 도착해서도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결혼식장 입구의 안내용 게시판에 붙어 있는 종이에는 친구의 결혼식 이전과 이후에도 빽빽이 결혼식 일정이 적혀 있었다. 나는 친구의 이름을 발견한 후에 한 번 웃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내 신세가 우스워서인지, 5월의 신부를 맞이할 친구가 부러워서인지 이유 모를 웃음이었다. 나는 로비에서 검은색 턱시도를 차려입은 친구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축하의 말을 전하며 손을 내밀었다.


“누구시죠?”


친구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녀석, 결혼한다고 긴장했구나. 결혼식 때문에 정신없는 친구의 입장이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조금은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악수를 하기 위해 내밀었던 손을 얼른 호주머니에 넣으며 웃었다.


“아, 홍성루씨죠?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요.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는 미안해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 친구와 악수를 하였다. 축하해. 행복하게 살아. 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고이는 듯 했다.


결혼식은 예정되었던 11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회자가 마이크를 통해 결혼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주례를 맡으신 분은 친구의 고등학교 은사님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나는 모르는 분이네. 어, 그러고 보니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 사이였던가? 중학교였나?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정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신랑 입장이라는 사회자의 말에 이어 유난히 턱시도가 잘 어울리는 친구가 들어왔다. 친구는 긴장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고 이를 본 하객 중 몇 명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뒤이어 신부 입장이라는 사회자의 말과 함께 아버지의 손을 잡은 친구의 아내가 들어왔다. 신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친구는 장인어른에게 큰 절을 한 후에 신부의 손을 잡았다. 주례 선생님의 주례사가 있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행복하게 살라는 틀에 박힌 주례사였다. 주례사가 있는 동안에 졸고 있는 하객도 보였다. 주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친구가 만세 삼창을 했고, 뒤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리며 친구와 친구의 아내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행진했다. 그리고 결혼식은 끝이 났다.


나는 축의금을 내면서 받았던 식권을 들고 결혼식장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서 일주일 중에서 오직 일요일에만 느낄 수 있는 평화로운 기분과 함께 휴식을 취할 것이다. 침대에 누워 지난주부터 듣기 시작한 팝송을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회색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문도 활짝 열어 둬야지. 나는 갈비탕에 숟가락을 담그며 미소 지었다.


‘드르르륵’


바지 속의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진동 모드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울렸다는 말보다 떨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홍성루씨죠? 아직 결혼식장에 계신가요?”


마침 결혼식장에 하객으로 왔던 사람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를 찾는 걸 보면 나를 잘 아는 사람이겠지. 오늘 결혼한 친구와 나의 단짝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고등학교 동창 관계였던가? 그에게 물어봐야겠군. 그런데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두드려댔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누구시죠?


나를 찾아온 남자는 자신을 역할 대행 업체의 사장이라고 소개한 후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저도 이 결혼식에 왔다가 조금 전에 바로 옆 결혼식장에도 다녀왔습니다. 오늘이 길일이라서 결혼식이 많이 잡혔더라고요. 역할 대행을 나갈 회원이 부족하게 되서 저도 하객으로 올 수 밖에 없네요. 뭐, 이런 날만 있다면 먹고 살기는 좋겠지만요.”


…….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드릴게요. 홍성루씨가 나갔던 곳에서는 항상 고맙다는 전화가 오거든요. 역할 대행인이 아닌 진짜 가족이나 친지, 또는 친구 같았다는 말과 함께요. 지난 목요일에 찾아가신 상가에서는 부조금도 내셨다면서요? 알아보니 오늘도 축의금을 내셨다던데. 자, 이거 받으세요.”


그는 나에게 흰색 봉투를 건넸다.


왜 이러세요? 그건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낸 돈입니다. 나는 그가 내민 봉투를 받지 않은 채 말했다.


“아, 착각을 하셨나보군요. 이건 이번 달 수고비입니다. 내일 은행 계좌로 입금하려고 하다가 마침 같은 곳에 오게 되어서 직접 드리려고 돈을 가져 왔습니다. 인사도 드릴 겸해서요. 홍성루씨는 우리 회사의 특별 회원이시니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 달 수고비요?


“네, 이번 달은 세 건이나 하셨네요. 지난 주 토요일에 김현희씨의 동창회 모임에서 애인 역할 대행, 목요일에는 부친상을 당하신 손대석씨의 상가에서 조문객 역할 대행, 그리고 오늘은 이민수씨의 결혼식에서 하객 역할 대행을 하셨네요. 한 가지 제가 걱정스러운 점은 부조금으로 내신 돈을 제하면 실제로 홍성루씨의 수입이 얼마 되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뭐, 그래도 부조금은 성루씨가 좋아서 내시는 거라니까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식사 하시던 중에 죄송하네요. 그럼 마저 드세요, 전 가보겠습니다.”


그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악수를 청했다. 악수를 한 후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돌아서며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서인현씨 되시죠? 아직 결혼식장에 계시죠?”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그는 다른 특별 회원을 만나러 가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하려던 질문을 차마 하지 못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결혼한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오늘 결혼한 이민수라는 사람은 역할 대행 업체에 의뢰한 고객이고 나는 그의 의뢰 조건에 맞는 역할 대행 업체의 대행인이었다. 무슨 일이든 맡게 되면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내 성격 탓에 역할 대행 일도 정말 착실히 해왔던 것 같다. 내가 진짜라고 느끼고 몰입했을 만큼. 다른 사람들은 아르바이트 정도로 여기고 하는 일인데 말이다. 그동안 내가 살았던 삶은 진짜가 아닌 거짓 삶일까. 나는 트루먼의 삶을 거짓 삶이라 비웃어왔던 나의 오만함을 비웃듯 큰 소리로 웃으며 갈비탕 그릇에 담긴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하던 하객들이 내 웃음소리를 듣고 나를 쳐다보았다. 실성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그들의 시선. 하지만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그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까. 나는 더 큰 소리로 웃고 나서 갈비탕 그릇을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이미 식어버리긴 했지만 아직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국물이라도 마셔서 허전해진 내 마음을 채워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스친 생각에 깜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갈비탕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우리 부모님이 부모 역할 대행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

아니, 반대로 내가 아들 역할 대행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여동생은? 내 직장은?

계약 기간이 길어서 아직 수고비를 주지 않는 것일까?


갈비탕 그릇 안에 있어야 할 갈비와 당면이 국물과 함께 식당 바닥 위를 굴러다닌다. 그리고 갈비탕은 이제 더 이상 갈비탕이라 불리지 못할 것이다.


내 곁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그 어디에도 없다. 나우히어가 아닌 노웨어.
 

- 2005년 12월 13일 조약돌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