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형사 생활 15년이 된 나는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그날의 그 사건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맡은 첫 사건이기도 했던 그 일이 떠오르면 내 몸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1. 비가 내리는 겨울날
혈액형에 관한 영화가 개봉했던 해의 겨울이었다. 겨울에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그 해는 나에게 정말 특별한 해였다. 어렸을 때부터 경찰의 꿈을 가지고 살아온 내가 경찰의 꿈을 실현한 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맡았던 첫 사건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몇 달간의 대기 기간 후 경찰서에 발령을 받은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강력반에 지원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강력반보다는 교통과에 지원하기를 권유하였지만 누구보다 투철한 정의감에 불타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시작된 강력반의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험상궂은 얼굴과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강력반 형사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내가 선배로 모시게 된 사람들은 자상한 인상에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각될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강력반 생활은 막이 올랐다.
일반 회사로 치면 수습 기간으로 여겨질 기간을 보내면서 나는 강력반 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다. 조서를 작성하는 법부터 시작해서 - 선배들 중 한 명은 독수리 타법이지만 누구보다 조서를 빠르고 정확하게 작성했다 - 용의자를 다루는 법, 잠복근무를 하는 방법 등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나도 이제 단독으로 사건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비가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어제까지 추웠던 날씨가 오늘은 풀린 것인지 눈이 아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난 번 폭설 이후로 눈에 대한 낭만이 사라지고 오히려 비를 기다리던 내 마음 속 반가움은 나를 문 밖으로 이끌어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리는 비와 함께 사색에 잠기려던 찰나였다.
“이봐, 신 형사. 자네가 맡을 첫 사건이네. 드디어 단독 수사구만. 축하하네.”
사건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 축하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 그건 바로 그 누군가의 불행을 의미하니까 -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사건입니까?”
과연 내가 맡을 첫 사건은 어떤 사건일까? 나는 기대와 함께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다.
“살인 사건.”
이제는 익숙해진 것일까. 강력반에 뼈를 묻은 지 15년이 되었다는 선배는 웃는 얼굴로 살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2. 흡혈귀 출현
내가 맡은 사건은 정말 이상한 살인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20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그의 방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 되었다. 특이한 점은 그의 피가 증발해버린 것이다. 증발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피가 사라져 버린 것을 달리 어찌 표현한단 말인가. 부검 팀에 의하면 그의 공식적인 사인(死因)은 끈에 의해 목이 졸려진 질식사였다. 서서히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숨이 멎어가는 동시에 과다 출혈로 심장이 멎었다는 것이다. 그의 왼쪽 팔뚝에는 굵은 주사 바늘로 찌른 듯한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누가 무슨 이유로 그의 피를 뽑아간 것인가? 이런 의문에 빠져 있던 나는 뒤늦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목덜미 뒤에 난 상처가 끈에 의해 파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바로 이빨 자국이었다.
‘누군가 그의 목에 날카로운 이를 꽂고 피를 빨아 먹었다는 말인가?’
이런 추측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럼 이건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흡혈귀의 소행이란 말인가. 사건은 시작부터 미궁에 빠져 들고 있었다. 피해자 주변 인물들의 치열을 시신에서 발견된 치열과 대조해보았지만 아무런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언론은 혹독할 정도로 경찰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리고 흡혈귀의 출현 소식에 사람들은 경악하였고 공포심에 사로 잡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같은 유형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20대 초반의 남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전 사건과 같은 방법이었고 시신에서 발견된 목덜미 뒤의 이빨 자국과 팔뚝에 난 주사 바늘 자국도 그 전의 것과 일치했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치열은 이번에도 일치하지 않았다. 또 다시 언론은 점점 미궁에 빠져만 가는 사건을 집중 보도했고 무능한 경찰을 타깃으로 연일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 이 흡혈귀 사건을 맡은 신참 형사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때 이 일에서 손을 떼야 했었는데…….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같은 유형의 사건이 일어났다. 개중에 모방 범죄도 있었지만 변사체의 치열과 바늘 자국이 일치하는 살인 사건이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일어나고 있었다. 피해자는 20대 남성이라는 것을 빼고는 공통점이 없었다. 사건 발생 지역도 경기도 전역이었기에 잠복근무라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게 사건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을 때 수사를 다른 형사에게 넘기라는 압력이 상부로부터 내려왔다. 나는 나의 자존심을 걸며 수사를 넘길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수사를 계속해서 할 수 있게 해준 단서가 발견되었다. 너무 사소하게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버렸던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피해자들의 혈액형이었다. 그들의 혈액형은 O형으로 모두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수사의 방향은 최근에 O형 혈액을 수혈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3. 사건 해결, 그리고…….
수사의 방향이 바뀌고 나서도 또 다른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어 수사권을 다른 형사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했던 점은 그 이후로 유사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굶주렸던 흡혈귀가 배를 채우고 그의 성으로 돌아갔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나돌았다. 밤늦은 시간에 외출을 꺼렸던 사람들은 이제 다시 밤의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나 공포심에 떨었던 전국의 O형 남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언론도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서 크게 떠들지 않았고 경찰도 이 사건을 미해결 사건으로 돌리며 수사 규모를 축소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때 경찰을 조롱하려는 듯 마지막 사건이 발생했다.
마지막 사건의 현장에서는 두 구의 시신이 발견 되었다.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20대 중반의 O형 남성이 침대에 누워 싸늘한 시선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옆 침대에서 용의자로 추정되는 20대 후반의 남자 시신이 발견 되었다. 그의 왼쪽 팔뚝에는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고 그것을 통해 O형 혈액이 수혈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 안과 식도, 위장에서 O형 혈액이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 O형 남성의 사인(死因)은 이전과 같았다. 용의자 남성의 혈액형은 A형이었는데 그의 사인(死因)은 혈액 응고였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전말은 용의자의 일기장을 통해 밝혀졌다. 그의 여자 친구가 그에게 이별을 선언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의 혈액형 때문이었다. A형 남자는 소심하여 남자 친구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그녀의 이별 선언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그의 혈액형이 O형이었다는 것이 O형 남성들이 피해자가 된 이유였다. 용의자는 O형 혈액을 계속해서 수혈 받아 자신도 O형이 되면 그녀가 자신을 다시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차례에 걸쳐 O형 혈액을 수혈 받은 그는 마침내 혈액이 응고되어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미궁에 빠질 뻔했던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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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잠시 옛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옆자리에 앉은 신참 형사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오늘로 잠복근무 7일째, 차 안에서만 생활해서인가 갑갑함을 느끼던 차에 때마침 비가 내렸다. 한 겨울에 내리는 비는 색다른 운치가 있다. 차창을 잠시 열어 내리는 비에 손을 적신다. 시원하다.
형사 생활 15년 동안 내가 해결하지 못한 사건은 없었다. 이제 나도 웃는 얼굴로 살인 사건을 입에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용의자의 얼굴 표정만 봐도 그의 진술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나에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해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용의자를 알지만 잡을 수 없었던 기묘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은 그 사건이나 해결해 볼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봐 신참. 자네 혈액형이 뭔가?”
“O형입니다.”
“그렇군. 자네는 태어날 때부터 O형이었나? 사람의 혈액형이 변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 나처럼 말이지.”
차창 밖으로 내밀었던 겨울 파카가 젖어버린 후에야 나는 차창을 다시 올렸다.
“히터 좀 잠시 틀지. 옷을 말려야겠어.”
“네, 선배님.”
나는 겨울 파카를 벗어 뒷좌석에 걸어 둔다. 겨울 파카 안에 입은 반소매 차림이 이상한 듯 신참 녀석이 힐끗힐끗 거린다. 나는 비에 젖은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이제는 아물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아물지 않은 굵은 주사 바늘 자국을 손톱으로 긁던 내 오른손은 신참 형사의 목을 향해 뻗어 나간다.
- 2005년 5월 18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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