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신의진이다. 남들이 꺼리는 직업인 경찰이 나의 직업이다. 그것도 교통과 순경도 아닌 강력반 형사이다. 올해로 30살이 되는 내가 친구들에게 항상 듣는 말은 “너는 결혼하기 힘들겠다.”라거나 “그래서 내가 그때 교통과로 가라고 했잖아.” 따위다. 내가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고 지원한 곳이 강력반이었을 때 홀로 나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펑펑 우셨다. 친구들도 나의 결정에 반대하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나는 한 번 결심한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라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반에 들어갔다. 나는 변변찮은 봉급과 목숨을 담보로 내어놓고 뛰어다니는 강력반 형사라서 항상 여자친구를 오래 사귀지 못한다. 나의 첫 인상에 반했던 여자들도 내가 범인을 잡기위해 잠복근무를 하는 동안 나를 떠나간다. 물론 이 기간을 견뎌낸 여자도 한 명 있었다. 설희라는 이름의 그녀는 내가 소매치기를 잡다가 칼에 찔려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나를 돌보다가 얼마 후에 더 이상 내가 다치는 모습을 못 볼 것 같다며 나를 떠나갔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여자보다는 일을 더욱 사랑한다. 강력반에서 누구보다 우수한 형사가 되는 것이 나의 목표다.
강력반 생활 5년째 되던 날 하루 쉬게 되었다. 특별 휴가인 것이다. 강력반 생활 5년을 하는 동안 죽지 않은 것을 축하한다며 친구 녀석이 술 한 잔을 산다고 한다. 나는 그 녀석의 축하 아닌 축하를 받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휴대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살인 사건이 발생해서 출동한다는 선배 형사의 전화였다. 그 현장이 어디인지 물어봤지만 선배는 휴가나 마저 즐기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먼저 가봐야겠다는 말을 하였고, 친구는 내년 오늘도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죽지 말라고 웃으며 인사하였다. 강력반으로 돌아온 나는 살인 사건 현장의 위치를 알아낸 후에 택시를 잡아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은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이었다. 이미 많은 취재진이 몰려와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하고 동료 형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신참 형사가 구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피살자는 매우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된 곳에는 천장에서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붉은 빛깔이나 점도로 봐서 피가 분명한 액체는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액체가 떨어지는 발원지는 바로 공사판 모래를 거를 때 쓰는 체였다. 공중에 걸린 체에 고기 덩어리가 여러 조각 걸려 있었다. 범인은 피살자를 살해한 후에 시신을 토막 낸 후에 체에 걸려놓았다. 엽기적인 범행답게 현장에서 범인의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감식반의 감식 결과 피살자는 20년 동안 119 구조대원 활동을 해 온 46세의 남성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가 며칠 전에 20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인명 구조 활동을 해온 것에 대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토막 난 사체 중에 사건 현장에서 끝내 찾지 못한 것은 피살자의 아래턱이었다.
엽기적인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반이 갖춰지고 있었다. 선배 형사들은 이번 살인 사건의 담당을 하지 않으려하는 눈치였고, 토막 살해당한 시신을 보며 구토나 하는 신참들이 이 사건을 맡는다는 것도 무리라는 결론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나는 반장님에게 이 사건은 아무래도 연쇄 살인 사건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고 말을 한 후에 이 사건을 맡고 싶다는 의견을 내어 보였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의 담당 형사는 내가 되었다.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첫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피살자가 생겼다. 피살자는 도난당한 헌혈 버스에서 팔에 주사 바늘이 찔린 채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팔에 꽂힌 주사 바늘을 통해 피가 모이던 혈액봉투는 쏟아져 나온 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너덜너덜하게 터져버렸다. 피살자는 헌혈용 침대에 꽁꽁 묶여있었기 때문에 범인의 범행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에는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감식 반에게 지난 살인 사건 피살자의 윗니 치열을 통해 컴퓨터로 아랫니 치열의 형태를 만들어 내라고 하였다. 감식반이 만들어낸 아랫니 치열과 두 번째 피살자의 목에 난 이빨 자국은 90프로 이상 일치했다. 범인이 첫 번째 피살자의 아래턱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고 이번 일은 연쇄 살인 사건이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미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피살자는 며칠 전에 헌혈을 많이 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대한 적십자사에서 표창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첫 번째 피살자와 두 번째 피살자가 사회에 봉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 이상 수사의 초점은 거기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연쇄 살인 사건의 다음 범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번 사건 수사를 기회로 삼아서 승진할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쇄 살인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나야만 한다. 이런 나의 마음을 범인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한동안 조용하더니 다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체는 외진 산길에서 발견되었는데 피살자는 20대 후반의 여성 의사였다. 그녀는 낙태 반대 운동을 하는 시민 단체의 공동 대표 중의 한 사람이었다. 범인은 역시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만 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체 부검 결과 피살자에게서 지난 번 피살자와 똑같은 이빨 자국이 발견되어졌고 왼쪽 팔에서 주사 바늘 자국도 발견되어졌다. 피살자의 사인은 주사 바늘을 통해 피가 과다하게 빠져나간 과다출혈로 인한 심장 쇼크였다. 그리고 그 외에 성폭행을 당한 흔적을 찾아냈다. 피살자에게 남겨진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과 음모가 발견된 것이다. 이것으로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 범인의 정액과 음모를 이용한 DNA 감식이 의뢰되어졌다.
DNA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또 다른 피살자가 생겨났다. 목덜미의 이빨 자국과 팔에 난 주사 바늘 자국으로 보아 같은 범인의 연쇄 살인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렵게 막아두고 있던 매스컴이 순식간에 터져버렸다. 네 명의 피살자가 살해당한 방법이 언론을 통해 일반인에게까지 자세하게 알려졌고 사회는 공포에 빠졌다.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가 출현한 것이 아니냐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동안의 범행 방법으로 보아 가능도 한 이야기였지만 경찰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또 다른 미해결 사건이 나올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경찰청은 긴급 대국민 발표를 통해 수사 현황을 발표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범인의 DNA 감식 결과만 나오면 된다는 것이었다.
DNA 감식의 결과물을 기존의 유사 범죄자들의 것과 비교 대조해 본 끝에 DNA 지문이 일치하는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할 수 있었다. 그는 살인과 강간 등의 혐의로 3차례나 복역을 한 후에 모범수로 풀려났던 3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경찰청은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용의자를 체포하는 장면을 한 방송국에 동행 취재를 하게 하였다. 그 장면을 본 시민들은 공포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경찰청을 지지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용의자는 자신이 여의사를 성폭행했음을 인정했지만 살인 혐의는 완강히 부인하고 있었다. 살인 전과가 한 번 있는 그가 이번에 살인 사건으로 기소되면 사형수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의 혐의 부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같은 유형의 범죄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범인의 범행 방법과 사체에 남기는 이빨 자국이라던지 주사 바늘에 대한 이야기는 매스컴을 통해 누구나 접할 수 있었기에 일어난 모방 범죄였다. 유력한 용의자가 체포된 상태에서 일어난 모방 범죄 피살자의 사체에 남겨진 이빨 자국의 치열은 기존의 것들과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방 범죄를 막고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는 용의자의 자백이 필요했다. 하지만 용의자는 네 명의 피살자가 살해당한 시각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었다. 여의사를 성폭행한 후에 도망쳤고 여의사의 사망 시각으로 추정되는 시각의 알리바이도 완벽했다. 사건은 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이번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법의학자를 파견하겠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나는 강력반 반장님을 통해 법의학자의 파견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내가 맡은 사건인 만큼 나만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반장님도 법의학자의 파견을 막을 힘을 가지지는 못했다. 파견 나온 법의학자는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자신을 김수현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이번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정보를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범인은 피에 대한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고, 사회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꼼꼼한 성격을 가진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의 남성이다. 현재 체포된 용의자도 그녀의 주장에 딱 들어맞았지만 그녀는 그는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그녀와 함께 그동안의 사건 현장을 돌아보았다. 더 이상의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뭔가를 알아낸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가 알아낸 사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유력한 용의자가 갇혀 있는 상태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단순한 모방 범죄라 생각했던 수사반은 피살자의 사체의 목덜미에 남은 이빨 자국이 기존의 연쇄 살인 사건의 것과 일치한다는 감식반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피살자의 팔에도 주사 바늘 자국이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피살자의 피를 이용하여 범인이 메시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연구실의 벽에 “날 잡을 수 있을까?”라는 말이 써져 있었다. 그 메시지를 본 수현은 그 메시지는 범인이 자신을 향해 남긴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동안의 범행의 피살자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었던 점에 비해 이번 피살자는 그냥 평범한 시민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담배를 꺼내어 물고 고민에 빠져있던 나에게 수현이 다가와 피살자들의 공통점을 알아냈다고 말하였다. 피살자들의 혈액형이 모두 O형으로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에 주먹으로 벽을 치며 자책을 하고 있었다. 수현은 피가 흐르는 내 손을 잡아채며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법의학자의 파견을 반대했던 나의 오만함과 수현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그녀의 눈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수현이 피살자들의 공통점을 알아낸 이후에 더 이상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가끔씩 나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연쇄 살인 사건이 아닌 나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고, 나도 어느 정도 그녀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가 내어 놓는 범인의 성격이나 특성이 나를 모델로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의심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빨리 범인을 잡아야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곧 찾아왔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었다. 연쇄 살인 사건의 마지막을 알리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신고를 받고 뒤늦게 출동한 나와 수현은 사건 현장에서 두 구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20대 초반의 O형 남성이 피살자였는데 목덜미의 이빨 자국이나 팔의 주사 바늘 자국이 앞서 피살자의 사체에서 발견된 것과 완벽히 일치했다. 피살자의 바로 옆에는 피살자의 팔과 자신의 팔의 혈관을 긴급 수혈 장치로 연결시킨 채 숨져 있는 범인이 있었다. 범인은 20대 후반의 남자였는데 사인은 혈액 응고로 인한 심장 마비였다. 그의 가방 안에서 처음으로 살해당했던 구조대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살점은 이미 썩어버린 아래턱과 치열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의 일기장에서는 여자 친구가 자신을 버린 이유가 자신이 성격이 소심한 A형이기 때문이라고 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새로 생긴 남자가 O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O형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글도 있었다. 이로써 범인은 잡혔고 연쇄 살인 사건의 수사는 종결되었다. 비록 완벽한 사건 해결은 아니었지만 연쇄 살인 사건은 끝이 났다.
수사가 종결되고 그동안의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나는 연쇄 살인 사건 수사 종결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3일의 특별 휴가를 받게 되었다. 나는 수현에게 함께 여행 갈 것을 제안했고 그녀도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산장으로 둘 만의 여행을 떠났다. 그녀와 함께 와인을 한 잔씩 마신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녀의 말을 들은 후 우린 몸을 섞었다.
“사람의 혈액형이 바뀌는 경우에 대해 알아?”
침대에 누운 채 그녀를 바라보며 웃던 나는 그녀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법의학자의 지식을 동원한 명쾌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골수 이식을 한 후에 혈액형이 바뀌는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외에도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거라며 그녀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나는 O형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A형이다.
초등학교 때 나는 학교에서 혈액형 검사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A형이었다. 나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화를 내며 내 혈액형은 O형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나는 O형이라고 말해야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A형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어머니는 나의 종아리를 때렸다. 나는 그렇게 O형이 되었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중학생이 된 후에 나는 나의 혈액형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B형이고, 아버지는 O형이었기에 내가 A형으로 태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점점 부담감과 미안함으로 바뀌게 되는 일을 알게 된 그 순간을 나는 평생 증오하게 되었다. 그날은 우리 집에 어머니의 대학 동창들이 놀러온 날이었다. 동창들의 대화를 통해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기 얼마 전까지 만나던 남자가 A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내가 그 사람과 어머니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고 아버지에게는 O형 아들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혈액형에 대한 나의 강박 관념은 심해져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우리 가족은 교외로 나들이를 가게 되었다. 한적한 시골 도로를 달리던 중에 차에 문제가 생겨서 아버지는 차를 세우고 뒤에 오는 차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나와 어머니는 차 안에서 쉬고 있었고 시골 도로라서 차는 자주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음주 운전이었던 소형 트럭이 아버지를 치어버렸다. 나는 놀라서 차 밖으로 뛰어나갔고 어머니는 서둘러 119에 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고, 뒤늦게 도착한 119 구조대가 가진 혈액으로도 수혈을 했지만 피가 모자란 상황이었다. 구조대원이 가족 중에 아버지와 같은 O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나는 그에게 내가 이 사람의 아들이고 O형이니 내 피를 수혈하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혈액형에 대한 간단한 검사도 없이 내 피를 아버지에게 바로 수혈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A형인 내 피가 들어가자 혈액 응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의료 사고임을 숨기려는 119 구조대와 내가 다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숨기려는 어머니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약간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덮어졌다. 하지만 나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준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피가 더럽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갔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의도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경찰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목숨보다 정의 사회 구현에 앞장 서는 경찰이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잡지에서 20년 동안 아무런 인명 사고 없이 구조 활동을 해온 한 119 구조대원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해맑게 웃는 표정의 그의 모습을 난 또렷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나의 더러운 피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그때의 그 구조대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범행을 시작했다. 복수가 끝난 후 나는 아버지와 같은 O형 피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순결한 O형 피를 가진 이들의 피로 나의 혈액형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범인인 동시에 그 범인을 쫓는 형사 역할을 하느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고, 거기다가 나를 의심하는 수현을 만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수현은 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의 어린 시절 아픔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이 나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나는 그녀의 혈액형이 O형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이곳 산장으로 데려온 곳이다. 여기 산장 안에 그동안 죽였던 사람들의 피를 혈액 봉투에 담아 모아 놓았다. 그리고 수현의 피까지 함께 모아 나는 오늘 나의 혈액형을 바꿀 것이다. 내 더러운 A형 피를 뽑아내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피와 함께 나를 사랑하는 그녀의 O형 피를 집어넣을 것이다. 그녀의 팔에 주사 바늘을 꽂았다. 그녀의 비명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 2006년 1월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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