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같은 이야기/단편

[단편 소설] Be the Reds(빨갱이가 되자)

조약돌(Joyakdol) 2009. 5. 14. 02:47
Be the Reds(빨갱이가 되자)


오후 10시 정각을 알리는 시계 화면이 끝남과 동시에 <파.고.다.>의 방송 시작을 알리는 화면과 함께 로고송이 송출된다. 화면은 방송 스튜디오의 모습으로 바뀐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사회의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을 ‘파헤쳐 보고, 고민해 보고, 다시 보는’ <파.고.다.>의 최성훈입니다. 지난 주 방송에서 다루었던 인터넷의 악성 댓글에 대한 시청자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이 한 국회의원의 “악성 댓글 처벌법” 발의라는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저희 방송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제 옆 자리에 <파.고.다.>의 김익선 프로듀서가 나와 있습니다. 김 피디, 오늘 방송에서 다룰 내용을 소개해주시죠?


- 네, 안녕하십니까? 김익선입니다. 오늘 <파.고.다.>에서 다루어 볼 문제는 그동안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잘 꺼내려하지 않았던 색깔 논쟁입니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빨간색을 꺼려하는 풍습이 만연하였습니다. 반공 의식이 철저히 강조되어 온 그 당시에 방송 프로그램이 공산주의의 상징이라고 여겨진 빨간색에 대해 다룬다는 것은 아마도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풍토는 점점 바뀌어왔습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로 빨간색을 선호하는 국민들이 늘어났죠?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거리 응원 장면이 자료 화면으로 나온다. 화면에서는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응원을 하고 있다.


- 네, 그렇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 개최와 함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선전으로 인해 빨간색을 이용한 마케팅, 이른바 레드 마케팅이 성공을 하였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로 모든 국민이 빨간색 티셔츠 한 장 이상은 가지게 되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 'Be the Reds'라는 영어 문구가 새겨진 이 빨간 티셔츠를 말씀하시는 거죠?


- 네, 맞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공식 서포터즈인 붉은 악마에서 제작한 이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레드 마케팅은 2006년 독일 월드컵 기간에도 또 한 번 성행하게 됩니다.


-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월드컵 거리 응원입니까?


- 아닙니다. 하지만 월드컵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입었던 이 티셔츠와는 관계가 있습니다.


- 'Be the Reds' 티셔츠 말씀이시군요?


- 네, 그렇습니다. ‘Be the Reds(비 더 레즈)'라는 영어 문구를 우스개 소리로 ’빨갱이가 되자‘라 해석하는 말을 들어보신 분도 있을 겁니다. 이 ’빨갱이‘라는 말은 과거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자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입에 담기 꺼려하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이념 논쟁의 시대가 아닌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오면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 제가 어렸을 때에 반공 포스터나 책에서 보았던 ‘빨갱이를 때려잡자.’라던가 ‘머리에 뿔난 붉은 소’ 이야기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 네, 맞습니다. 이제 빨간색은 더 이상 공산주의만을 떠올리게 하는 색깔이 아닙니다. 얼마 전 <파.고.다.>가 한 리서치 기관에 의뢰해서 실시한 ‘빨간색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것은?’이라는 설문 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2002년 월드컵’이라고 대답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설문 조사 결과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자료 화면으로 나온다. ‘빨간색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것은?’이라는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1위가 2002년 월드컵으로 나타나고 피, 헌혈, 김치, 신호등, 일요일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 이런 시대 상황을 대변하는지 스스럽지 않게 ‘빨갱이가 되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할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김 피디의 말이 끝나자마자 흑백 화면으로 과거 빨치산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점점 컬러로 변화하는 화면은 각종 다양한 종류와 모양의 빨간색이 소개되고, 마지막으로 ‘Be the Reds' 티셔츠가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미리 녹화, 편집된 취재 장면이 나타난다.


- 우리는 ‘빨갱이가 되자’고 외치는 집단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그들은 누구이고, 어떤 이유로 빨갱이가 되려고 하는지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신변 보호를 요청한 제보자를 우리는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가명을 사용하고 음성 변조를 해 줄 것을 요구한 제보자에게서 우리는 비밀 집단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풀 수 있었습니다.


화면으로 모자이크 처리가 된 제보자의 모습이 나타나고 자막으로는 신정(가명, 36세)라는 문구가 나타나면서 제보자의 음성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거 음성 변조되는 거 맞죠? 제가 이런 인터뷰를 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저는 빨갱이에서 제외가 될지도 몰라요. 벌써 저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는 빨갱이 명단에서 영구 제명 되었습니다.”


- 빨갱이가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입니까?


“빨갱이요? 흐흐.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빨갱이냐? 빨갱이가 아니냐? 바로 이거죠. 소위 빨갱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어떤 특별한 힘이 있어야 해요. 국가 유공자이거나, 또는 고귀한 신분이거나, 또는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거나. 요즘 사람들은 빨갱이를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너도 나도 빨갱이가 되고 싶어 하는 거죠.”


- 빨갱이가 되는 것이 어떤 자격을 얻는 거라면 이런 자격을 부여하는 곳이 따로 있는 것입니까?


“자격 부여요? 그건 당연히 정부 아닌가요? 대한민국 정부 말이죠. 그 잘난 정부의 높으신 분들이 1년에 한 번씩 우리를 분류합니다. 육질 좋은 소나 돼지의 몸뚱이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로 낙인을 찍듯이 말이죠. 정부의 심사 기관의 심사를 통해 우리는 빨갱이인지 아니면 빨갱이가 아닌지로 분류가 됩니다.”


- 그렇다면 빨갱이가 되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의 생활이 다릅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생활의 차이가 없다면 누가 그렇게 기를 쓰고 빨갱이가 되려고 하겠어요? 빨갱이가 되면 떡하니 사람들 앞에 자신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내세울 수 있죠. 거기다가 사람들은 빨갱이를 우러러보고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도 많아요. 매일매일 빨갱이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하고요.”


- 그럼 빨갱이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그야 말 그대로 빨갱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평범한 생활을 하는 거죠. 그 누구도 잘 기억해주지 않는 그런 조용한 삶을 사는 겁니다. 그리고 내년의 심사에서 빨갱이가 되기 위해서 1년간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 거죠. 그런데 참 우스운 것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빨갱이가 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누구는 출생 신분이 좋아서 평생을 빨갱이로 떵떵거리며 사는데 누구는 평생을 노력해도 빨갱이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제보자와의 인터뷰 화면이 멈추고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온다. 그리고 최성훈의 모습이 나타난다.


- 김 피디, 이거 충격적인 내용인데요? 아직도 신분제의 악습이 남아 있는 곳이 있군요.


- 네, 시청자 여러분도 방금 전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놀라셨을 겁니다. 저희 제작진 또한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방송으로 다루기 위해 지난 몇 달간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였습니다. 저희는 소위 빨갱이가 되는 자격을 심사한다는 그 정부 기관의 관계자에게 수차례 인터뷰를 요청하였지만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과거 심사 기관에서 근무했다는 사람과의 전화 인터뷰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화면은 다시 전화기가 돌아가는 모습으로 변하며 제작진과 심사 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과의 전화 인터뷰 내용이 자막과 함께 음성 변조된 목소리로 나온다.


- 빨갱이가 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분류하는 정부 기관이 정말 존재하는 겁니까?


“그렇죠. 과거에 저도 그 기관에서 심사를 담당했습니다.”


- 심사 기준은 무엇입니까?


“심사 기준이요? 그건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있어요.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전통도 따져보고, 이 사람이 빨갱이가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발전에도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도 고려해보고요. 이외에도 여러 가지 내용을 다 따져본 후에 빨갱이가 될 사람들의 명단을 정하게 됩니다.”


- 이건 공산주의 사회와 같지 않습니까? 정부가 지나치게 한 사람의 인생까지 관여하는 것 아닙니까?


“과연 그럴까요? 정부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부가 정한 기준이 없다면 너도나도 빨갱이라고 소리치고 다닐 거라고요. 우리는 단지 우리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노력할 뿐입니다. 한 사회에 필요한 빨갱이보다 수가 늘어나려고 하면 그 수가 늘어나지 않도록 억제하고, 만일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적절하게 빨갱이의 수를 늘리는 거지요. 요즘은 자기가 빨갱이가 아니면서도 빨갱이인양 착각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진 사람도 많이 늘어났더군요. 빨갱이 옆에 있으면 자기도 빨간 물이 드는지 아는 사람 수가 늘어나고 있어요. 이건 무조건 선진국만 따라 가려고 해서 그래요. 우리 나름의 정체성도 없이 ‘선진국, 선진국’ 이러니까 지금 나라꼴이 이 모양 아니겠습니까?”


전화 인터뷰 화면이 정지하면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온다.


- 인터뷰 내용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내용 중에 선진국을 따라간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빨갱이를 심사하고 분류하는 것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보군요. 김 피디,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 그렇습니다. 우리는 취재 중에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빨갱이를 심사하고 분류하는 제도가 이미 전 세계에 공공연히 퍼져 있다는 사실이죠.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파헤치기 위해 외국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나라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


화면이 전환되면 일본 나리타 공항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취재 차량이 이동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한 대학교의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백발의 일본 대학 교수와의 인터뷰 장면이 계속된다. 인터뷰는 자막으로 보이는 동시에 우리말로 더빙 녹음이 되어있다.


- 빨갱이를 분류하는 제도가 일본에도 존재하는가?


“그런 제도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존재합니다. 사람들의 주 관심사이니까요.”


-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본의 경우도 한국의 경우와 그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빨갱이를 분류하는 기준과 빨갱이의 수는 크게 다르겠지요. 이런 빨갱이의 수와 선정 기준을 보면 그 나라 고유의 문화에 대해 알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빨갱이도 있는가?


“네,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선호하는 것이 다르듯이 일본 내의 빨갱이의 인기 순위도 개인에 따라서 조금씩 다릅니다.”


일본 대학 교수와의 인터뷰 화면이 정지되면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온다.


- 인터뷰 내용 잘 보았습니다. 인터뷰 내용 중에 흥미로운 말이 있더군요. 빨갱이의 인기 순위가 있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 네, 저희도 그 말을 흥미롭게 생각하였습니다. 빨갱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것이 그 나라 고유의 문화까지 설명할 수 있다는 일본 대학 교수의 말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 김 피디, 그렇다면 도대체 빨갱이의 정체가 뭡니까? 이제는 뭔가 확실히 설명할 때가 아닙니까?


- 네, 맞습니다. ‘파헤쳐 보고, 고민해 보고, 다시 보는’ <파.고.다.>의 진행 순서에 따라 지금까지 우리는 빨갱이에 대해 알아보고 그들의 정체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보는 일만 남았습니다.


- 그렇군요. 그럼 이제 다시 보도록 할까요? 시청자 여러분, 지금까지 보았던 방송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살펴보는 형식으로 오늘 프로그램을 마감할까 합니다. 빨갱이에 대한 해석은 시청자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럼, 다음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최성훈 아나운서와 김익선 프로듀서가 꾸벅하고 인사를 하면서 화면은 정지된다. 화면은 이동하여 텔레비전을 비추고 그 앞에 앉아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를 비춘다.


[이 방송 은근히 재미있는 걸? 빨갱이가 도대체 뭘까?]


그의 혼잣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면에는 커서가 깜빡이고 있다.


누구보다 먼저 게시판에 빨갱이의 정체를 밝히려는 당신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 2009년 5월 14일 조약돌 고쳐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