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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같은 이야기/MB 마일리지 전쟁(Mileage Battle)

1. BUSAN, 38317

어둠으로 가득 찬 8평짜리 방. 밤인데도 불이 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무도 살지 않거나 집주인이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 하얀 물체가 움직이는 것 같더니 '삑'하는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 전원이 켜졌다. 화면 속 두터운 옷을 껴입은 리포터가 고속버스 터미널에 서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500만 명 이상이 서울을 빠져나갔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5시간 20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SBS 뉴스 김민희입니다."


"아, 뭐야. 민희, 또 너니?"


어둠 속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에서 막 깬 듯 낮게 잠긴 남자 목소리였다. 남자는 손을 뻗어 리모콘을 찾았고, '삐빅'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이 꺼졌다. 


남자는 리모콘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는 손짓을 해댔다.


'야옹' 소리와 함께 흰색 털이 부드럽게 자란 고양이가 남자의 품에 뛰어들었다.


"민희야, 오빠랑 다시 자자. 오늘은 배고파도 푹 자고, 내일 같이 떡국이나 먹자고."


남자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노력했다. 잠에서 깨어 한 것이라고는 왼손으로 리모콘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고양이를 안아주는 작은 행동 밖에 없었기에 그의 몸은 여전히 잠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가 잠에 들려던 찰나 '띠릭'하고 문자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남자는 문자를 확인해볼까하다가 설날 인사를 빙자한 단체 문자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며 꿈나라를 향해 달려갔다.


"빽도라니, 아... 다 이긴 걸 져버렸네."


"와아아아, 이겼다. 2만원 내놔요."


남자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다시 깼다. 그의 품에 안긴 민희는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잠을 방해한 것은 친지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이웃집이었다. 이웃집에서는 막 윷놀이 한 판이 아슬아슬하게 끝난 모양이었다.


남자는 다시 잠을 청하려했지만, 이번에는 잠이 그를 외면했다.


"민희야, 설날이 무슨 날인지 아니? '너는 왜 결혼 안하니? 엄마 친구 아들은 결혼해서 벌써 아이가 2살이란다. 넌 언제 취직할래? 넌 왜 이 모양이니...' 이런 말을 듣는 날이란다. 설날의 설은 혀 설자가 분명해."


남자는 잠든 고양이, 민희를 향해 하소연을 했다. 이웃집이 다시 조용해졌지만, 남자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띠릭'하고 울렸던 문자 메시지가 생각났다. 단체 메시지가 분명할 설날 인사 문자에 답장을 할 요량으로 휴대전화를 밀어서 잠금해제했다. 아직 무료 문자가 남았기 때문에 아까울 건 없었다.


[월드 마일리지 배틀(World Mileage Battle), 대한민국 부산 광역시 대표(BUSAN, 38317)로 선발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지금 바로 홈페이지에 접속하셔서 당신을 대신할 캐릭터를 생성해주세요. 캐릭터가 생성되는 즉시 콘트롤러를 보내드립니다.]


"월드 마일리지 배틀? 이건 또 무슨 스팸이야? 부산 대표는 또 뭐래? 난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고. 서울 특별시민이란 말이야."


남자는 자신이 응모한 적도 없는 이벤트 당첨 문자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야옹, 야옹."


남자의 혼잣말에 깼는지 민희가 남자의 품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난 민희는 방안을 돌아다니더니 책상 위로 뛰어올랐다. 절전 모드로 남자와 함께 잠을 자고 있던 컴퓨터가 잠에서 깨어났다.


"민희야, 이리와."


남자의 말에 민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별로 대꾸를 하지 않는 민희였지만...


방 안의 어둠을 쫓아낸 컴퓨터 모니터를 끄기로 결심한 남자는 일어났다. 그는 마우스 위에 앉은 민희를 보며, '고양이가 쥐를 잡았군'이라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았다.


쥐를, 아니 마우스를 민희의 위협으로부터 빼앗은 후 남자는 컴퓨터를 끄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월드 마일리지 배틀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 이 유치한 이름이 뭔지 검색이나 해보자.'


남자는 인터넷 창을 켜고 문자 메시지로 온 월드 마일리지 배틀 홈페이지 주소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Winner takes all mileage! World Mileage Battle!]


마치 사행성 게임 홍보 문구와도 같은 글귀가 홈페이지의 상단부를 채우고 있었다.


[당신의 도시명과 코드 숫자를 입력하세요]


남자의 눈에 두 개의 공란이 들어왔다. 


"도시명과 코드라... 문자에 있던 그건가?"


남자는 방바닥에 뒹굴고 있던 휴대전화를 주워들고 밀어서 잠금해제했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듯 공란에 도시명과 코드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도시명: BUSAN, 코드 숫자: 38317]


입력이 끝나자 홈페이지는 자동으로 닫혀버렸다. 


"이게 뭐야? 혹시 신종 사기 수법 아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33세, 무직의 통장 잔고는 너무나 가벼웠기에...


민희가 다시 쥐를 잡으려고 했다. 남자는 컴퓨터 전원을 꺼버린 후, 쥐를 민희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다시 어둠을 덮고 잠을 청했다. 이웃집에서는 '못 먹어도 고고고'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2013년 2월 9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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