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사람 13,100명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신장, 골수, 간장을 이식 받은 사람 1,695명
뇌사자 86명으로부터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 363명.
“휴우.”
지나간 통계 자료를 보던 나는 한숨을 크게 지었다. 뇌사자 86명이 363명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내 몸의 전율이었다.
내 나이 올해로 스물아홉, 내년이면 나도 가수 김광석이 그의 노래 ‘서른 즈음에’에서 말하던 것처럼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질 나이다. 나는 올해로 입사 2년차가 된 평범한 직장인이다. 남들은 내 나이쯤 되면 미래의 배우자를 고르기 위해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빠른 승진을 위한 노력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물론 나에게도 사귄지 3년이 지난 여자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 일을 핑계로 그녀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작년 가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함께 영화를 봤었던 적이 있었다. 인간이 죽을 때 몸의 무게가 21그램이 줄어드는데 그것이 인간이 가진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 영화의 핵심 내용이었다. 미신이나 신, 종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나에게 그런 영화의 내용은 억지스러운 내용일 뿐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후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의 영혼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느냐고. 나는 웃으며 그녀의 질문을 회피했었다. 지금이라면 그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텐데…….
쌓여가는 업무 때문에 야근이 이어졌고 나는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그러다 오랜만에 어느 토요일 저녁의 달콤한 휴식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그동안 지친 몸을 쉬게 하고 있었다. 잠을 청하지 않았는데 깜빡 잠이 들었을 때의 나른한 기분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기분을 느끼며 잠이 들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자정이 지나 일요일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였다. 토요일 밤에 하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눈을 떠요>라는 코너가 있는데 각막 기증 운동을 벌이고 있고, 그녀도 감동을 받아 각막을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함께 각막 기증을 할 것을 권유했다. 담에 하지 뭐. 간단히 대답을 한 후 나는 전화를 끊었다. 약간은 삐친 듯한 그녀의 반응에 마음이 쓰였지만 나에게는 달콤한 잠에 대한 욕구가 더 컸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그녀와 내가 만나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나에게 그녀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와 이별을 경험했다. 그녀가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의 무심함이 이별의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별에 담담했던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더 집중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노력을 하늘도 알아 준 것일까.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나는 과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회사 창업 이래 가장 파격적인 인사라는 소문이 회사 내에서 나돌았지만 그 뒤에 나의 숨은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이제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한 나에게 여유로움이 손짓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아는 분의 소개로 새로운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시간은 또 흘러가 나도 어느 덧 삼십대 중반이 되어 가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힘이 나는 딸아이가 나에게도 생겼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내 일생에 커다란 폭풍우가 몰아 친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부장으로 승진하였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회사 선후배,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술집을 여러 번 옮겨 다닌 후 술이 어느 정도 얼큰하게 올라오자 우리는 노래방으로 향했다. 나는 여직원의 노래를 듣다가 집에서 나를 기다릴 아내가 생각나서 전화를 하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찬 바람을 쐬며 휴대 전화를 꺼내 집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는데 한 행인이 다가왔다.
“김상현 부장님.”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오늘 부장으로 승진한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신호음이 들리는 휴대 전화를 손에 든 채로 그를 살펴보았다. 남루한 옷차림의 그는 거리의 부랑자쯤으로 생각되었다.
“누구시죠?”
“김상현 부장님, 오늘은 2011년 4월 9일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날짜 관념 없이 일과 직장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나에게는 정말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일 모레가 아내의 생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뒤늦지 않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행인에게 알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고마운 마음은 행인이 보여 준 종이 한 장을 본 후에 증오와 저주로 바뀌었다.
“김상현 부장님, 이제 기억나시나요? 계약 기간이 만료 되었습니다.”
나는 20년 전의 그 일이 생각났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지리산으로 가게 된 수학여행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3박 4일간의 수학여행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학교로 돌아오던 차 안이었다. 지난 밤 밤새 놀며 선생님 몰래 숨겨온 맥주도 한 모금 마셨던 터라 나는 피곤함을 느끼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가 급커브 길에 미끄러져 저수지로 추락을 한 것이다. 다행히 뒤따라오던 차량 운전사의 신고로 신속히 구조는 되었지만 병원으로 옮겨진 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같은 병원으로 옮겨진 반 친구 중의 몇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는 것을 귓가에 들려오는 통곡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이제 내 차례가 점점 가까워온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내 눈에는 믿기지 않는 것이 보였다. 내 단짝 친구의 영혼이 내가 누워 있는 침대 근처를 서성거리는 것이 아닌가. 돌아오는 버스의 가장 앞자리에 앉았던 그 친구의 몸은 버스가 저수지에 추락할 때 수압에 깨진 앞 유리 파편에 수없이 난도질당했던 것이다. 몸은 성한데 영혼의 생명이 다해가는 나와 영혼은 멀쩡하지만 돌아갈 몸이 없는 그 친구에게 다가온 사람이 바로 서른다섯의 나에게 계약서를 내밀고 있는 그였다. 영혼을 기증할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을 들은 후 친구는 자신의 영혼을 나에게 기증하기로 했고 나도 동의했다. 물론 친구의 영혼의 남은 기간만큼, 그 기간이 바로 20년이었다.
그동안 꿈인 듯 여겼던 일이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자 나는 서서히 친구의 영혼이 내 몸을 떠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내 영혼이 20년간 정들었던 친구 상현이의 몸을 떠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내일 신문 기사는 어느 30대 회사원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댈까.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그녀의 권유에 따라 각막 기증 등록이라도 해놓을 걸……. 내 손에 쥐어진 휴대 전화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오다 점점 희미해졌다.
- 2005년 5월 15일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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