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같은 이야기/MB 마일리지 전쟁(Mileage Battle)

7. 헤르미온느와의 데이트

조약돌(Joyakdol) 2013. 2. 16. 21:31


배틀의 피로감으로 지쳐쓰러져 잠든 후, 남자가 잠에서 깬 것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DAEGU와의 배틀이 아닌, JEJU와의 배틀이 기다리고 있는 밸런타인 데이의 해는 이미 하늘 높이 떠있었다.

여자친구도 없고, 최근에는 만나는 사람도 없는 30대 무직 남자. 이것이 남자의 최근 프로필이었다. 그래도 준수한 외모를 자랑하는 남자이기에 지인들이 가끔 소개팅을 시켜주려고 하지만, 그것은 지인들이 남자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머릿속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말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였다. 백수인 그에게 소개팅은 사치 그 이상일 뿐이었다. 요즘은 민희를 먹여살리는 것도 힘들어, 남자는 고급 사료는 고사하고 일반 고양이 사료도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고양이처럼 사료나 간식거리를 요청하지 않고 사람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어주는, 아니 먹어주시는 민희에게, 아니 민희 님께 고마울 따름이었다.

민희가 사실 우렁각시라서 오늘 같은 날은 남자에게 초콜릿이라도 하나 건네주면 어떨까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았다.

남자는 일어나서 씻고, 민희와 함께 밥을 먹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JEJU와의 배틀이라...'

남자는 갑자기 배틀에 흥미가 떨어졌다. 그는 제주도에 대한 연상 기억법을 시작했다. 유배지, 감귤, 돌 하르방, 한라산, 올레 길...

남자는 이런 배틀은 24시간을 준비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료 영화로 올라온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을 감상한 후에 배틀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뵤, 아자자자자."

이소룡이 높이 떠오르며 영화가 끝났다. 이번 배틀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지는 모르지만, 혹시나 쿵푸나 무술 대결이라면 이소룡의 절권도라도 흉내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는 민희에게 '사요나라'라는 인사를 한 후 누워서 콘트롤러를 머리에 썼다.

*******

배틀 장소는 예상했던대로, 제주도 한라산이었다. 이 배틀을 신청한 사람, 아니 남자로 추정하고 있는 JEJU, 06478은 진부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이왕에 제주도를 배틀 장소로 선택했다면 바닷가라던가, 어디 경치 좋은 곳, 그래, 남자가 가보지 못한 올레 길과 같은 곳으로 초대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남자는 취직을 하면 여름 휴가는 제주도로 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잠시 후, 배틀 상대인 JEJU, 06478가 접속했다. 로딩 시간이 있어 검은 실루엣으로 시작된 상대가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아!"

남자는 탄성을 질렀다. 염색을 한 갈색 머릿결을 한 그녀는... 그녀는 마치 배우와도 같았다. 아니, 영화 배우였다. 

"엠마 왓슨!"

남자의 말에 검은 실루엣의 주인공, 이제는 실루엣이 아닌 모습을 드러낸 상대가 대응했다.

"아니야, 난 헤르미온느야."

그랬다. 남자의 눈앞에 있는 자는 분명 호그와트 그리핀도르 기숙사의 엘리트 여학생 헤르미온느였다.

"삐이이이. JEJU, 06478. 벌점으로 생명력을 1퍼센트를 깎습니다. 월드 마일리지 배틀은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개인 정보를 노출할 경우 제재를 합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면 영구 추방될 수 있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게임 마스터의 안내가 있었다. 남자는 "그럼 진짜 헤르미온느란 말이야?"라고 말했고, 여자는 "그깟 1퍼센트 깎으라고 해. 그래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BUSAN 씨! 그럼 빨리 배틀을 시작해요. 난 오늘 저녁 데이트가 있어서요."

JEJU는 상큼하게 웃으며 BUSAN을 재촉했다. BUSAN은 그 미소에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 밸런타인 데이. 아, 초콜릿!"

무의식적으로 나온 BUSAN의 말에 JEJU는 깔깔거렸다.

"오빠, 디게 웃기다. 초콜릿 받고 싶구나? 자!"

JEJU는 BUSAN에게 초콜릿을 하나 건넸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생긋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초콜릿을 건네 받았다.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꼭 사오던 그것, 감귤 초콜릿이었다.

'미인계로 대결하는 건가? 이런 배틀이라면 져도 좋아.'

BUSAN은 햇볕에 녹은 초콜릿처럼 몸이 녹아들고 있었다.

"야아아아옹."

어디선가 고양이 소리가 들렸고, 녹아서 사라질 뻔한 남자는 정신이 들었다. 

"그래, 이건 배틀이다. 이왕 시작한 거 최선을 다해보자."

BUSAN은 정신 차리게 해준 '야아아아옹'에게 감사했다. 남자가 나중에 알게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콘트롤러를 착용하고 누워있는 남자의 배를 민희가 꾹꾹 밟으며 내는 소리였다.

*******

오늘의 배틀 방식은 특이했다. 헤르미온느의 등장에서 눈치챈 사람도 많겠지만 JEJU가 택한 것은 마법 대결이었다. JEJU와 BUSAN의 손에  작은 나무 지팡이가 쥐어졌다.

"이, 이봐. 난 그 해리포터 시리즈를 잘 모른다고. 이건 너무 불공평해."

BUSAN의 말에 JEJU가 웃었다.

"그게 말이 돼? 어떻게 네가 해리포터를 모른다고 할 수 있어?"

"아니, 그건 안봤을 수도 있는 거잖아. 난 해리포터에 구미가 당기지 않았으니까."

"그래, 넌 언제나 해리포터를 질투했지. 안 그래?"

"......"

"내 말이 맞지? 론 위즐리!"

JEJU의 말에 BUSAN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라산 백록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으악, 이, 이건."

JEJU가 헤르미온느의 모습을 한 것처럼 BUSAN은 론 위즐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랬다. 오늘 배틀은 JEJU, 06478의 판타지를 구현한 것이다. JEJU는 평소에 선망하던 대상인 헤르미온느의 모습으로 배틀에 참여했고, 상대방은 론 위즐리가 되길 원했다. 이건 일종의 부부 싸움이었다. 왜, 부부 싸움이냐고 묻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고, 계속 궁금해하기만 하면 좋겠다. 혹시나 해리포터 시리즈의 끝을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더. 이것이 일종의 미리니름이 될지도 모르니까.

"자, 덤벼. 론."

JEJU가 소리쳤다. 두 사람의 몸이 백록담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

여기서 잠깐.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이봐요, JEJU는 헤르미온느의 모습을 한 것이지, 실제 헤르미온느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개인 정보 노출로 벌점을 받는 거죠? 이건 말이 안되잖아요."

이것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JEJU는 헤르미온느에 빠져버려 자신의 영어 이름을 헤르미온느로 사용 중이다. 자, 이제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었으니 배틀에 집중하도록 하자.

******

JEJU는 지팡이를 앞으로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엑스펠리아르무스."

JEJU의 지팡이에서 빛이 뿜더니 BUSAN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툭'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록담의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지팡이를 보며 BUSAN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건 밸런스 붕괴군. 월드 마일리지 배틀 기획자! 한심한 녀석."

JEJU의 주문은 무장해제였다. 배틀을 시작하자마자 지팡이를 뺏긴 BUSAN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지팡이를 떨어트린 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주문을 하나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삐이이이. JEJU, 06478. 벌점으로 생명력을 10퍼센트 추가로 깎습니다. 배틀 신청 시 말씀드렸던대로 그 주문을 사용하면 저작권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주문을 알지 못할 시 공평하지 않으므로, 특정 주문 사용은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또 다시 GM의 개입이었다. 헤르미온느, 아니 JEJU는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다고"라고 말하며 아쉬워했다. BUSAN의 손에는 떨어졌던 지팡이가 다시 들려있었다.

배틀은 이제 정말 시작인 것인가. 밸런타인 데이 약속이 있다며 빨리 배틀을 끝내고 싶다던 JEJU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일까.

"번쩍."

BUSAN은 '이렇게 하는 건가'며, 지팡이를 뻗으며 소리를 내봤다. 그리고 그의 지팡이에서 번개가 뻗어나가며 JEJU를 공격했다.

BUSAN의 생명력이 100%인 상태에서, JEJU의 생명력이 82%로 떨어졌다.

"아씨, 정말. 치사하네."

온몸에 번개가 찌릿찌릿 느껴지던 JEJU가 씩씩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피로 맺은 계약에 따라 내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다. 나와라. 백록담의 정령이여."

백록담의 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소용돌이와 함께 솟아오른 물방울이 하나씩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르방이었다. 돌이 아닌 물로 만들어진 '물 하르방'이었다.

JEJU의 곁에 떠오른 물 하르방은 BUSAN을 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혼저옵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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