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같은 이야기/단편

EPE(EarPhone Evolution)

조약돌(Joyakdol) 2008. 10. 9. 01:27

프롤로그

세상은 고요하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도, 신나는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금 나는 아주 긴 줄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나의 몸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 나의 귀!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이미 N13579가 지배하였다. 오늘도 난 EP(EarPhone)N13579를 보충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2004.9.

매스컴이 떠들썩했다. 일본의 초미니 카세트 전문 제작사인 S사가 3년 전 카세트의 초 소형화(3 X 4cm)에 이어 감성 인식 기능을 가진 이어폰을 개발해냈다. 지난 10년간의 비밀 연구(프로젝트명 EPE)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EP속의 N13579가 사람의 감성 변화를 인식하여 사람의 귓속 달팽이관을 대신해서 소리를 전달해주는, 이른바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신기술이었다. EP는 귓속에 내장되고, S사의 중앙 컴퓨터와 신호를 주고받으며 그 임무를 해나가는 것이었다. 신기술이 개발될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은 S사의 EP가 사람의 감각중추는 물론이고 그 개인까지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EP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그리고 나도 그 조그만 기계를 내 귓속에 장착시켰다.



2005.3.

소리가 이상하다. 마치 주파수를 정확히 맞추지 못한 라디오 방송 같다. 불현듯 EP가 생각났다. 그 동안 EP를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할 만큼 EP는 내 몸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청각 이상의 원인을 EP라고 단정하며 나는 EP를 귓속에서 빼냈다. 고요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병원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을 알게 되었다. 내 청각세포가 어떤 물질에 의해 변이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물질은 아직 의학계에 보고 된 적이 없다고 했다. N13579! 난 이번에도 그렇게 단정 지었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내 생각이 맞았다.

EP속의 N13579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EP를 처음 사용한지 6개월 정도가 지나면 N13579가 소멸되고 청각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EPN13579를 보충해야한 다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EPN13579는 첫 판매된 지 6개월 만에 가격이 2배로 올랐다.

EP가 처음 나왔을 때의 사람들의 우려 -S사의 EP가 사람을 지배하게 될 것- 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소리를 들으려 하는 본능에 이끌려 N13579를 보충하기 시작했고, S사의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노예가 되었다.



2005.4.

EPN13579에 대한, 그러니깐 S사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사람을 노예화한 S사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 행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국제기구는 힘을 잃은 지 오래고, 이미 전 세계는 달러화가 아닌 엔화의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일본의 최첨단 산업에 대한 집중 투자가, 세계의 최강자라 여기며 안일하게 대처하던 미국을 눌러 버렸다. 일본은 제2식민지 제국 건설을 꿈꾸며 여러 최첨단 산업에 투자를 했고, 그들의 꿈은 조금씩 실현되어 가고 있다. S사의 EP는 그 중 일부분인 것이다.



2005.9.

사람을 노예화한 양심의 일부분이 눈을 떴다. S사의 연구 개발 요원인 이시와키가 EP의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S사로부터 많은 돈을 받고 있었고, S사의 차세대 주자로 불려질 정도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잔인함, 그 속에서 조금씩 싹텄던 양심이 피어났다. 그는 자신의 연구 개발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회의를 품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였어도 선()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시와키는 EP의 비밀폭로 선언 얼마 후 싸늘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비밀을 폭로하지 못한 채.



2005.10.

EP의 비밀,S사의 그것을 알아내기 위한 결사대가 조직되었다.

N13579를 보충하는데 많은 돈을 써버린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N13579의 가격은 계속 솟았고, 이성을 가진 사람이 청취본능에 굴복하여 N13579는 세계를 좌지우지하였다. 나는 결사대에 지원하는 대신 N13579를 보충하기 위해 줄을 섰다. 한 달에 한번은 보충해야 하기에 언제나 정의를 추구하고자 노력하던, 노력했었던 나였지만 지금은 S사에 굴복하였다.



2006.3.

드디어 결사대가 움직였다. 난 결사대에 지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EP의 비밀을 알아내기를 은근히 바랬다. 그 바람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사대 그들 역시. 그들은 S사에 침입하여 EP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노력하였다. EP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2의 식민지 제국 건설을 꿈꾸는 이들이 그리고 그대로 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 정보를 소홀히 다루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다 이시와키 사건까지 있지 않았던가. EP에 관한 정보는 모두 없앴고, 오직한 군데에만 남겨두었다. 그곳은 그 어떤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곳, S사 사장의 두뇌였다. 그 조그만 두뇌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 비밀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결사대는 모두가 자결하였다. 그들의 자결은 N13579EP, 그리고 S사에게서 벗어남을 의미하기도 했다.



2006.10.

S사 사장이 죽었다. 그것은 전 세계의 충격이었다. 그 사악한 자가 죽어서 모두 기뻐했으나, 그의 두뇌가 죽었음을 슬퍼했다. 마지막 비밀을 담아두었던 그의 두뇌,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 이제 EPN13579의 생산과 보충은 S사의 중앙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그 조그만 두뇌가 이 일을 해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나마 남아있던 희망도 모두 사라졌다.



2006.12.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다. 시끄러웠던 자동차 소리도, 신났던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주 긴 줄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귀! 여전히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지금도 N13579가 지배하고 있다. 아직까지 난 EPN13579를 보충하기 위해 줄을 서있다.

내가 S사에게서 벗어남을 선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에필로그

1998, 현재. 세상은 시끄럽다. 그렇지만 그 시끄러움이 축복일 수 있다. 소설이 현실로 실현되는 경우가 있었다. 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 1998년 조약돌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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